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
작년에 극장에서 이 영화가 꼭 보고 싶어 어느 잡지인가 신문에서 이 영화를 상영한다는 극장을 찾아 갔다가 하도 장사가 안되서 간판을 바꿔 달았다는 말에 망연자실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사실 내가 이 영화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거리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 어떻게 하면 이 포스터를 구할까 하는 아주 유치한 발상에서 비롯되었다(어쨌든 이 포스터를 꼭 구해야 하는데, 아직도 못 구했다).
여하튼 난 작년에 비디오방에 가서 결국 이 영화를 보고야 말았는데 오늘 다시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 진 몰라도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 두 번째로 이 영화를 보면서 얼마나 유쾌하고 즐거웠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영화는 여러 가지 컨디션에 따라 다르게 보이나 보다.
영화는 우리의 주인공 파니가 남자친구를 구하는 비디오를 촬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카메라에 대고 '여자의 행복에 남자가 꼭 필요하나요?'하고 당돌하게 묻는 그녀는 30살 난 노처녀이다. 내 소견으로 그녀는 운명적인 사랑이 자신을 구제해 줄 것이라고 믿는 중증 말기 공주병을 앓고 있는 환자다. 요즘 신문을 보면 30에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라는 책광고가 가끔 보이는데 아마 파니도 이 책을 샀으리라. 파니는 몇 번의 사랑을 실패하고 이젠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파니는 공항 세관에서 일하고 있는 커리어 우먼으로 독신이고 싶어서 독신인지 아니면 아직 짝이 나타나지 않아서 독신으로 지내고 있는지 모호한 상태에 있다. 그녀는 해골귀거리를 하고 다니며 자살법 강의에 나가며 관을 짜다가 거실에 두고 가끔 거기서 자기도 하고, 언제나 검은 옷에 검은 모자만 쓰고 다닌다. 게다가 출근하던 어느 날 차창 위에 죽은 비둘기까지 떨어져 있질 않나……. 그녀의 주변엔 죽음의 흔적만이 존재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런 파니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이웃과 함께 공간이라고는 엘리베이터뿐이다. 바로 이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사건이 비롯되기 시작한다. 그녀의 이웃에 사는 오르페오(음, 이 자도 '흑인 오르페'인데 그럼…….)는 점성술가로 가동이 멈춘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판 굿거리를 함으로써 다시 엘리베이터를 가동시킨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술행위를 통해 파니의 삶 속에 뛰어든 오르페오는 파니를 위해 사랑 점을 쳐준다는 핑계로 많은 돈을 뜯어내기 시작한다.(내 눈엔 아무리 봐도 꺼벙한 파니가 노련한 오르페오에게 사기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오르페오는 파니에게 곧 그녀 앞에 장신에 잘 생기고 비싼 양복을 입은 그리고 가장 중요한 '23'이라는 숫자와 관련된 멋진 남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엉터리' 예언을 해주고 230마르크를 뜯어낸다. 이것조차 '23'과 관련되었다고 하면서……. 그러나 정말로 오르페오의 말대로 새로운 아파트 관리인인 로타르가 등장하면서 그의 예언들이 하나하나 맞아 들어가기 시작한다. 로타르의 차넘버가 2323인 것을 본 파니는 다분히 주술적인 애정의 힘만 믿은 채 로타르의 차로 돌진해 들어간다. 얄궂게나마 로타르와의 관계를 시작하게 된 파니의 삶은 이제 보랏빛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파니에겐 싸구려 저질 포르노 소설을 쓰는 매들린이라는 엄마가 있다. 이 아줌마는 자신의 나이를 망각한 채 잘 생기고 멋진 남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런 '호색걸(好色 girl)'이다. 한편 오르페오는 점성술을 본업으로 하면서 밤에는 게이 바에 나가 에디뜨 삐아프의 노래를 립싱크 한다. 그에게는 유명한 텔레비전 아나운서 애인이 있는데 그는 물론 남자다. 그는 오르페오에게 사랑을 고백하고(우와 정말 닭살이다!) 오르페오 또한 그를 사랑한다고 대답한다.
자신의 소극적인 성격 때문에 로타르와의 애정이 진전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파니는 속옷 바람에 춤을 추는 굿거리를 해도 별 소용이 없자 다시 오르페오를 찾아간다. 오르페오는 파니에게 로타르를 그녀의 남자로 만들 수 있는 비법을 알려준다. 몰래 로타르의 사진을 찍어다가 초를 켜놓고 주문을 외우거나, 그 남자의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옷을 훔치라는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주술과도 많은 공통점이 있는 사항들을 주문한다. 그래서 파니는 예쁘게 치장하고 몰래 찍은 사진을 촛불 앞에 가져다 놓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초가 다 탈 때까지 아무도 안 오자 다 때려치우려고 하자 누군가 오는데, 바로 파니의 바람둥이 엄마다.
아래층에서 애인과 다투고 애인이 떠나자 혼자 있으면 유령이 나타난다며 다람쥐 인형의 꼬리로 코를 비비던 로타르는 파니의 방에 찾아와 얼떨결에 파니의 엄마와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파니의 엄마는 몰래 달아나 버린다. 아침에 관에서 일어나 보니 자기가 꿈꾸던 남자가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다니 이런 기절할 노릇이. 그러나 이에 당황하지 않고 우리의 파니는 로타르의 그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자르고 그 비싼 '조르지오 아르마니' 양복마저 훔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언제나 일에는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는 법. 오르페오는 자신이 사랑하는 텔레비전 아나운서에게, 파니는 로타르에게 실연을 당하고 만다. 오르페오는 파니에게 '망각의 수프'를 먹이고 자신도 한 그릇 뚝딱 먹어치운다. 그리고 이제 영화는 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밀린 집세를 내지 못해 쫓겨난 오르페오는 이제 자기는 악트루스 행성으로 떠날 때가 되었다며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러면서 그 때를 위해 비싼 양복과 금을 준비하고 싶다면서 우리의 순진하기만 한 파니를 다시 한 번 등쳐먹는다.
마침내 그 날이 오고 오르페오는 악트루스 행성으로 떠나고 홀로 남은 파니는 외로움에 슬퍼한다. 그러던 어느 날 로타르는 아파트 세입자들을 모두 쫓아내기로 결정한다. 파니와 파니의 이웃들이 탄 그들의 유일한 공동의 공간인 엘리베이터가 또다시 가동을 멈추고, 파니가 여기서 오르페오에게 배운 굿거리를 한판 하자 다시 엘리베이터가 가동하고 이웃들은 그녀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그동안 파니의 곁에서 그녀를 주시해 오던 라쎄에게 파니는 차 한 잔할 것을 권하고 이것은 파티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 파티석상에서 라쎄의 런닝에 새겨진 숫자가 '23'인 것을 발견한 파니는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왔던 남자가 바로 곁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파니는 그동안 자신을 옭아 매어왔던 죽음의 상징인 관을 아파트 밖으로 내던져 버린다.
이것이 영화 <파니 핑크>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이 것 외에도 영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지만 많은 것들을 찾아낼 수 있다. 아마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이라고나 할까.
요즘 부쩍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나면서 그동안 유지되어온 남성위주사회의 기본법칙이 바뀌고 있다는 뉴스를 들었다. 이제 자유로운 직장생활을 통해 경제력을 가지게 된 여성들이 결혼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그들 나름대로의 자유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그러면서 남녀 모두 결혼연령이 높아져 간다는 소식도 곁들여서.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 파니는 처음에 남자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궁극적으로 파니의 행복은 진정한 사랑을 찾음으로서 완성된다. 여성감독인 도리스 되리는 어느 정도 위와 같은 사회적 현실을 영화를 통해 성공적으로 다룬 것 같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여성의 행복을 다시 남성에게 종속시킴으로써 자신이 이룬 성공을 반감시키고 있다. 물론 파니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될게 없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페미니즘적인 논쟁에 대해선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골치만 아플 테니까.
다음으로 다분히 흥미 있는 줄거리의 적재적소에 배치된 음악은 정말로 인상적이다. 에디뜨 삐아프가 부른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를 필두로 등장하는 제목을 알 수 없는 많은 샹송과 재즈곡들, 그리고 파니가 '잘 나갈 때'마다 나오는 모짜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나오는 '밤의 여왕의 아리아' 등 보석 같은 음악들이 영화의 재미를 더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영화에서 파니의 이웃 아줌마가 말해주는 경고 하나로 끝을 맺고자 한다.
"원숭이 대장 하누만(로타르)을 조심하지 않으면 당신 심장을 뜯어내 먹어버릴걸!"
※ 96년 11월 28일 재미나게 한 번 써봤는데 반응이 어떨지 궁금한 맥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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