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글] 에로망가 섬의 세 사람

에로망가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나가시마 유 작가와 두 번째로 만나게 됐다. 우선 제목 한 번 그럴싸하게 뽑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태평양 바누아투 공화국에 실재하는 에로망가(현지 발음은 이로망고 섬이 맞겠지만)라는 섬으로 에로 만화를 보러 간다는 어느 게임 잡지사의 기획으로 세 명의 남자가 여정에 오른다는 타이틀 단편을 위시해서, 모두 5편의 글들이 실려 있다.

역시 같은 제목의 타이틀인 <에로망가 섬의 세 사람>에는 각박한 도시 생활을 하던 중에 정말 황당한 기획으로, 남태평양의 섬을 찾아가는 세 남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로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사토, 오타쿠의 성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구보타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공의 냉철한 직관으로 볼 때 조금은 음산한 기운을 발산하는 협력업체 직원인 히오키가 그들이다.

나가시마 유 작가는 참 다양한 캐릭터들을 잘 만들어냈다. 조금은 냉정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토를 중심으로 해서 한편으로는 개그를 담당하는 구보타라는 인물을 그리고 그 좌측으로는 왠지 불협화음이 연상되는 히오키라는 인물을 배치하면서 일단 주인공들의 균형을 맞춘다. 섬에 도착하고 나서, 허리케인으로 그들이 원래 묵으려고 했던 숙소가 단박에 날아가 버렸다는 말에, 사토 일행은 가이드 겸 숙박업자라고 할 수 있는 존 존의 집에 묵게 된다. 유람을 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일을 하러 온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지만, 어쨌든 그들은 에로망가 섬에서 에로 만화를 보겠다는 자신들의 임무에 충실하다.

사실 개인적으로 타이틀 단편에 가장 관심이 있었는데, 정말 재밌게 읽은 건 <알바트로스의 밤>이었다. 도주 중인 두 명의 남녀가 심야에도 오픈을 하는 심야골프장에서 골프를 친다는 이야기다. 골프 코스를 돌면서, 남자는 어려서부터 프로 골퍼가 되라는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억지로 골프를 치게 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자신이 과외를 하던 주먹의 딸 미사토와 도망을 치던 중에 골프장에 들른 것이다. 자신의 오래된 트라우마를 이겨내면서, 주인공이 결말에 가서 독자들에게 안겨 주는 짜릿한 반전이 일품이었다.

<새장, 앰플, 구토>편에서는 어느 희대의 바람둥이에게 느닷없이 날아온 이메일 한통으로 자신의 연애 행각을 되짚어 보는 쓰다 미키히코라는 남자의 이야기를 작가는 들려준다. ‘선수’ 쓰다는 자신의 흥망성쇠 앞에서 수없이 스쳐간 여자들과의 인연을 재구성하면서 도대체 자신에게 이메일을 보낸 이가 누구일까 하는 회상에 젖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얽혀 있으면서도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던 이기적이었던 어느 남자의 넋두리 정도라고나 할까.

역시 하이라이트는 맨 끝에 거의 부록 수준으로 들어 있던 <청색 LED>였다. 마치 순환되는 이야기처럼 처음의 <에로망가 섬의 세 사람>들에 등장했던 인물 중의 한 명을 다시 등장시켜 섬에 다녀오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왜 그 섬에 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풀어준다. 나가시마 유 작가의 글을 통해 자신의 기존의 작품에 등장했던 인물을 우려먹는 “스핀오프” 소설 장르라는 것도 한 수 배우게 됐다.

제목에 나오는 것처럼 에로 만화에 대해 야한 상상을 했거나 혹은 남국의 정취를 듬뿍 느낄 수 있는 오쿠다 히데오 식의 재미를 기대했다면 <에로망가 섬의 세 사람>은 적합하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반전과 보통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에 대한 짜임새 있는 글에 목말랐다면 한 번 도전해 볼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by 레삭매냐 | 2009/12/07 13:01 | 책책책 | 트랙백 | 덧글(1)





[북글] 투 미닛 룰

아버지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꾸준하게 미스터리 스릴러물을 발간해 내는 비채 출판사의 뚝심에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여느 모중석 스릴러 클럽의 책들처럼 전혀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로버트 크레이스 작가의 창작력이 경이롭기만 하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아직 읽어 보진 않았지만,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된 로버트 크레이그 작가의 탐정 엘비스 콜 시리즈인 <몽키스 레인코트>에 대한 관심이 폭증했다.

우리나라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로버트 크레이스는 소설가가 되기 이전에 이미 유명 텔레비전 시리즈의 시나리오 작가로 그 명성을 날렸었다. 미국 루이지애나주 배톤 루지에서 태어나 20대 초반에 할리우드로 이주해서, 시나리오 작가 생활을 시작한 로버트 크레이스는 1980년대 유망한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삶을 끝내고 소설가로 변신을 시도한다. 하지만, 시나리오 작가에서 소설가로 전환은 그의 기대처럼 쉽지가 않았다. 1985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일대 전환기를 마련한 로버트 크레이스는 탐정 엘비스 콜이라는 멋진 캐릭터를 만들어내면서 드디어 성공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오늘 소개할 <투 미닛 룰>은 그의 페르소나처럼 등장하는 엘비스 콜이 나오는 소설은 아니지만, 충분히 독자들의 관심을 자극할만한 맥스 홀먼이라는 아주 입체적인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다. 맥스 홀먼은 어릴 적부터 다양한 어두운 범죄의 세계에 뛰어들게 되면서 평생을 범죄와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삶을 살았다. 은행을 털다가 현장에서 잡힌 맥스는 10년간의 교정생활을 통해 거듭나게 되고, 자신의 삶에서 잃어버린 조각들을 되찾으려는 의지를 불태운다.

하지만, 그에게 덧씌워진 전과자라는 레테르만큼이나 가혹한 시련이 보호감찰로 출소하게 되는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아들이자 LAPD 소속의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리치(리처드) 홀먼이 그의 아버지 맥스가 바로 출소하기 전날 어느 갱의 무자비한 총격으로 사망했다는 뉴스를 전해 듣게 된다. 맥스가 기대했던 새 출발은 초장부터 어긋나기 시작한다.

아, 그전에 앞서 로버트 크레이스는 LA의 연쇄 은행강도 사건의 주범인 마르첸코와 파슨스의 사건을 가볍게 소개한다. 미스터리, 스릴러를 좋아하는 팬들은 바로 눈치를 챘겠지만 이런 장르의 소설에서 절대 아무런 의미 없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범인은 아주 잠깐이라도 소설에 등장한 인물 중에 한 명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공식으로부터 시작해서 나중에 전개될 이야기의 복선과 암시의 지뢰들을 작가는 곳곳에 매설해 둔다. 추리소설은 어떻게 보면 일종의 독자와 작가와의 게임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작가는 힌트는 주되 너무 드러나지 않게 하면서, 독자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임무를 띠고 게임에 나서게 된다.

전과자라는 주홍글씨 때문에 아주 사소한 위법행위조차도 치명적인 맥스는 아들을 포함한 네 명의 경찰관들이 총격을 받은 사건을 자신의 시선에서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사건을 쫓는 과정에서 상식적이지 않는 점들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사건을 풀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자신을 체포한 전 FBI 요원 캐서린 폴라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마치 쥐와 고양이 같은 관계로 볼 수 있는 범죄자 맥스와 한 때 유능한 사법 요원이었던 폴라드의 기묘한 협력관계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전과자인 맥스 홀먼에게 보통 사람들이 의혹이 어린 시선이 아닌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에 대한 동정심에 폴라드를 자극해서였을까. 신뢰와 불신을 넘나드는 곡예를 하면서 그들은 사건에 관련된 미지의 인물을 찾아내기 위한 숨 가쁜 레이스를 펼친다.

여느 추리물처럼 사건의 본질에 다가갈수록 맥스 홀먼과 폴라드는 이 사건이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게다가 부패한 경찰들의 개입이라는 아들의 명예에 치명적인 오점이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면서, 아들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채 사건 해결에 몰두하던 맥스 홀먼은 자신의 신변에 대한 위협을 느끼는 동시에 깊은 회의감에 빠지게 된다.

로버트 크레이스는 할리우드로 대변되는 LA의 어둠 속으로 독자들을 조용하게 초대한다. 그동안 수많은 할리우드 산 영화를 통해 익숙한 지명과 마치 한 편의 긴장감 넘치는 탐정 영화를 보는 듯한 치밀한 구성과 텔레비전 시리즈 시나리오 작가로 내공을 쌓은 작가다운 속도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제목에 나오는 “투 미닛 룰”은 전직 은행강도 출신인 맥스 홀먼이 2분 내에 은행을 털어야 한다는 강박적 시간을 의미한다.

그렇게 소설 <투 미닛 룰>에서 시간은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맥스 홀먼은 아버지의 유산으로 받은 고장 난 타이멕스 시계를 차고 다니고, 교도소에서 보낸 10년이라는 세월을 자신의 아들 리치와 죽은 리치의 엄마 도나 배닉과 함께 하지 못했다는 회한에 사로잡혀 있다. 좀 더 일찍 마음을 고쳐먹고 죽은 아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은 은행강도에 차량 절도 전문가인 맥스의 양심을 사정없이 짓이겨 누른다. 그런 위태한 맥스의 심리 상태를 폴라드 요원이 정상에서 빗겨 나가지 않게 중심을 잡아 주는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렇게 로버트 크레이스는 캐릭터 간의 균형에도 절묘한 운용의 미를 보여 준다.

엘비스 콜 시리즈에서 이탈한 스탠드 얼론 <투 미닛 룰>로 로버트 크레이스와의 첫 만남을 가졌는데, 그 결과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어쩌면 이 계기를 통해, 그의 엘비스 콜 시리즈로 회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모중석 스릴러에서 로버트 크레이스의 또 다른 스탠드 얼론 <데몰리션 엔젤>이 출격 대기 중이라고 하는데 기대가 된다.


by 레삭매냐 | 2009/12/07 12:56 | 책책책 | 트랙백





[북글]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

교토의 수상쩍은 다다미 메이트릭스

모리미 도미히코라는 이름은 작년에 나온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라는 재밌어 보이는 제목의 책으로 알게 됐다. 아직 읽지는 못하고 지인에게 선물한 기억이 난다. 그리고 작가가 당근 여자인 줄 알았다. 오늘 리뷰를 쓰기 위해 인터넷으로 작가를 검색해 보니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 책에서 내내 낭창낭창한 의성어와 의태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를 하기에 여성작가로 착각했다.

작가의 연보를 살펴보니 그동안 도리미 작가가 발표한 책들이 거의 다 국내에 출간됐다. 특이할 만한 점은 일본 유수의 명문대인 교토대를 졸업한 그가 쓰는 소설의 배경은 모두가 교토 그것도 사쿄구라는 곳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2002년 월드컵이 열렸던 해에 처음으로 교토를 찾았었는데 기온, 난젠지, 킨카쿠지 그리고 철학의 길 등 한번은 직접 가봤던 곳의 명칭이 아주 익숙해서 더 좋았던 기억이다.

주인공 나는 대학교 3학년생으로, 지난 2년을 무위도식하면서 보냈는데 그 연원을 거슬러가면 자신의 숙적이자 단짝인 오즈가 자리 잡고 있다. 주인공의 전언에 의하면, 타인의 불행을 반찬으로 삼아 세 공기 밥을 뚝딱 해치울 정도로 악당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오즈가 해로운 행동을 하느냐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는 주장이다. 어디까지나 무익함에 초점을 맞춘 그야말로 일련의 얼간이 짓거리들로 하루해를 보낸다.

아마도 작가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나’는 검은 머리 아가씨와 감칠맛 나는 캠퍼스 연애 라이프도 꿈꾸고 하지만 태생적으로 게을러 먹은 위인이라, 귀차니즘으로 모든 것을 방치해 버린다. 대신 항상 ‘타기’할 대상인 오즈와 어울려 수상쩍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갖가지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벌인다. 이런 일들에 대한 도리미 작가의 섬세하면서도 구체적인 묘사가 바로 이 책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의 핵심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하지만, 정작 더 독자 제씨의 관심을 끄는 것은 모두 네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다다미 넉장반 세계를 중심으로 반복되는 메이트릭스(matrix) 같은 구성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똑같은 특징을 가진 캐릭터들의 등장과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해서 다만, 조금씩 다른 상황 전개가 읽었던 책을 두 번 세 번 읽는 것 같은 환영에 빠지게 한다는 맹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순 없으리라.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의고체(擬古體)의 문장들이 구어체에 익숙한 독자 제씨에게는 적잖이 당황활 수도 있겠지만, 세 번째 이야기와 네 번째 이야기로 넘어가면서부터는 뇌리에 의식화되어 어떤 색다른 전개가 펼쳐질지에 대해 기대감이 부풀기 시작한다.

책의 표지와 매장마다 오른쪽 페이지 끝에 매달려 있는 찰떡곰의 일러스트가 아주 마음에 들었는데, 교토에서 벌어지는 예의 상황극을 좀 더 시각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일러스트들을 풍성하게 넣어 주었으면 책이 더 재밌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어떻게 보면 방향성을 잡지 못한 채, 무의미한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을 청춘들을 계도하는 글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어느새 낭만이라는 어휘가 사라져 버린 채, 더 좋은 학점이수와 취업이라는 절체절명의 난제 가운데 허우적거리는 우리네 대학 청춘들이 떠올라 조금은 서글퍼지는 수상쩍은 청춘 사내들의 일탈기였다. 이제 곧 출간이 임박했다는 도리미 작가의 새로운 소설 <유정천 가족>을 기대해 본다.


by 레삭매냐 | 2009/11/18 11:02 | 책책책 | 트랙백





[북글] 결백

빼어난 스릴러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다

미국 출신의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작가 할런 코벤의 책을 처음으로 읽었다. 어제 오후에 책을 펴들었는데, 책의 서두 부분을 읽는 순간 <결백>을 다 읽지 않고서는 뭘 할 수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잠시 외출했다가 저녁 먹을 때만 빼고는 도저히 손에서 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정말 제대로 된 “페이지터너”였다. 결국, 자정을 넘겨서 다 읽게 됐다.

혹자는 할런 코벤의 작품이 너무 편차가 심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정말 운이 좋은 것 같다. 어떤 책이고 처음 접하는 책이 좋으면, 그 작가는 좋은 편으로 들어서게 되고 그렇지 않다면 반대편에 서게 되니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을 읽기 전에 바로 읽었던 폴 오스터 역시 전자의 대열에 들어설 것 같다.

프롤로그에서 이 책의 주인공 맷 헌터의 기구한 삶을 잘 요약해서 들려준다. 대학 시절, 원치 않는 싸움에 말려들어 과실치사를 저지르게 된다. 고의였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인명이 살상된 사건이니만큼 맷 헌터는 그로 말미암아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4년간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대학으로 돌아가 법학 학위를 받고, 자신의 친형인 버니가 일하는 법률사무소에 변호사 보조원으로 다시 사회에 복귀한다. 하지만, 전과자가 된 맷 헌터를 보는 지역사회의, 그리고 지인들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그에게 구원은 바로 아름다운 부인 올리비아다. 헌터의 대학시절 라스베이거스에서 우연히 만났던 인연의 끈이 닿아, 뉴저지에 보금자리를 튼 헌터 가족에게 어느 날 이 올리비아의 핸드폰 번호로 기이한 동영상이 전송되면서, 이야기는 매우 급하게 전개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근처 수녀원의 어느 수녀가 죽었는데 그녀의 죽음에서 도저히 수녀로서의 삶과는 동떨어진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슬슬 미궁으로 빠져든다.

또 한 명의 멋진 캐릭터로 맷 헌터의 초등학교 시절 친구이자, 이제는 뉴저지 검찰청의 민완 형사로 뛰어난 활약을 펼치는 로렌 뮤즈가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뜻하지 않았던 자살로 심리적 내상을 입은 로렌은 아버지의 죽음이 어머니 탓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불륜에 빠진 것으로 의심되는 아내 올리비아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맷 헌터가 사건 의뢰를 맡긴 도저히 사설탐정으로는 보이지 않는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 싱글 쉐이커 역시 매력적인 캐릭터다.

이런 다양하면서도 멋진 캐릭터를 읽는 재미만으로도 독자들은 황홀한데, 그의 치밀한 내러티브 구성이 결정타를 날린다. 가톨릭교를 기반으로 한 보수적인 미국 동부의 뉴저지와 이와는 대조적으로 환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공간적 배경으로 해서 할런 코벤은 화려한 전개를 펼친다. 책의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서로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할런 코벤의 소설적 깔때기에 걸려지면서 작가가 도처에 심어 놓은 암시와 복선들을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치 않다.

<결백>은 더 풍부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 내면의 본질에 대한 문제제기다. 가령, 예를 들어 실수지만 사람을 죽이고 다시 사회로 복귀한 맷 헌터의 고뇌와 그를 바라보는 피해자 부모와 사회의 시선, 그는 과연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자신의 과거를 모두 받아들이고 새로운 출발을 약속한 올리비아의 헌신적인 사랑, 자신을 버린 미혼모 엄마를 찾아나서는 십대소녀의 사모곡, 빗나간 우정으로 말미암은 궁극의 복수에 이르기까지 온통 인간의 삶을 혼란 그 자체로 만들 법한 이야기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바로 그런 예상하지 못한 것에 대한 기대감이 바로 이 책의 마지막 장까지 단숨에 읽게 하는 비결이 아니었을까.

역시 뭐니뭐니해도 미스터리 스릴러는 반전이다. <결백>은 그 반전에 있어서도 전혀 인색하지 않고 푸짐하게 독자들을 위해 진설한다. 모든 스릴러가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특히 아주 작은 단서들이라고 하더라도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한다. 너무 많이 중요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통에 이름 확인을 위해 다시 앞장을 찾아봐야 한다는 점이 옥의 티라고나 할까. 비채에서 꾸준하게 나오는 모중석 스릴러 시리즈 21번째 책이었던 <결백>에 흠뻑 빠졌던 11월의 어느 휴일이었다.

 

by 레삭매냐 | 2009/11/16 18:11 | 책책책 | 트랙백





[북글] 책이 되어버린 남자

어느 못 말리는 독서광의 고백

책의 표지가 너무 인상적이었다. 이 책이 어떤 성격의 책이라는 점을 결정적으로 밝혀주는 단서로, 한껏 크게 입을 벌리고 절규하는 남자의 뒤편으로 책들이 보인다. 그리고 “책이 되어버린 남자”라는 제목이 그 남자의 입속에서 독자들을 유혹한다. 독일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 알폰스 슈바이거르트는 이렇게 독자들을 어느 책에 미친 사나이의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인다.

특이하게도 이 책에는 목차가 없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설마 목차가 없을까 하는 마음에 목차를 찾아보았지만 역시나 목차가 없었다. 목차가 없어서, 도대체 책에 무슨 이야기가 들어 있을지 호기심이 증폭했다고나 할까.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서지학(bibliography)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비블리 씨다. <책이 되어버린 남자>는 벼룩시장에서 어느 여인의 의문사(리뷰를 쓰다 보니 책의 소유권과 관계된 순환적 구조의 반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와 더불어 비블리 씨가 벼룩시장에서 “그 책”을 슬쩍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파란만장한 모험의 연대기다.

슈바이거르트 작가는 비블리 씨를 열혈 독서광으로 설정했다. 자신이 원하는 책을 얻기 위해서라면 타인의 목숨까지도 앗아갔다는 어느 수도사의 이야기에 격하게 공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애서가인 비블리 씨가 “그 책”을 얻고 나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나머지 그동안 애지중지 모은 책들을 모두 헐값에 팔아 치운다.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그 책”으로 인해 그의 잠 못 이루는 밤들은 늘어만 간다.

작가 알폰스 슈바이거르트를 통해 이루어지는 비블리 씨의 책에 대한 고백은 같은 책쟁이의 고민을 대변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어렸을 적에는 플라스틱 레코드판에 미쳐서 밥도 굶어 가면서 모으곤 했었다. 이제는 충분한 경제력을 갖추게 돼서 밥도 굶으면서 책을 사거나 하지는 않지만, 꾸역꾸역 책을 사 모으고 있으며 여전히 품절이나 절판된 책에 대한 끝 간 데 모를 애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작가는 비블리 씨의 그런 책에 대한 사랑을 어느 순간, 판타지로 변형시킨다. 현실과 상상 속의 세계를 오가던 책쟁이의 망상이 판타지의 경계를 넘어서 버린다. 자신이 곧 책이 버린 비블리 씨는 문자 그대로 책이 되고서야 비로소 주체적 자아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 변신의 장면에서는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소설 <변신>의 주인공 잠자가 떠올랐다. <변신>에서 잠자가 생물인 벌레로 변했다면, <책이 되어버린 남자>에서 비블리 씨는 무생물인 책으로 변했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이 소설에서 무생물인 책의 활약은 비블리 씨의 그것을 오히려 능가한다.

그런데 정말 궁금한 건 “그 책”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는가이다. 물론 그에 대답은 두루뭉술하게 덮어 버린 채, 책과 동일시된 비블리 씨는 자신/책을 무시하거나 모욕하고 혹은 위협하는 객체를 향해 증오와 분노 같은 감정을 폭발시킨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책이 되어버린 남자의 욕망은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닫는다.

<책이 되어버린 남자>의 저자 알폰스 슈바이거르트와의 첫 만남은 주인공 비블리 씨가 걸출한 책쟁이라 그런진 몰라도, 많은 부분에서 ‘맞아, 맞아!’ 하는 폭넓은 공감대의 형성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어쩌면 이 정도로 책에 미친 사람들의 실존적인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릴 수가 있었는지 놀라웠다. 심지어 작가 역시 비블리 씨와 같은 부류의 애서가 혹은 독서광이 아닐까하는 추론을 해보기도 했다.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그 책”의 기이한 여정은 현존하는 책이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곳을 커버한다. 개인의 소장은 물론이고, 도서관, 비밀서고 그리고 무덤에까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판타지에 버금가는 모험의 묘사가 탁월했다. 물론, 그 과정이 필연적인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우연에 근거한 것이지만 바로 그 시점에서 작가의 상상력은 한껏 나래를 펼친다. 그리고 다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순환적 구성이 특히 일품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일러스트를 맡은 무슨이라는 일러스트레이터에게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책을 읽으면서 마치 한 편의 그림동화책을 읽는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무슨이 그린 일러스트들은 책에 등장하는 콘텐츠들의 시각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생각한다. 따뜻하면서도,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바들을 세심하게 짚어내는 일러스트레이터의 내공은 그야말로 득점 포인트였다. 그의 다른 작업이 궁금해서 그의 홈페이지인 무슨닷컴(http://www.moosn.com)을 방문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는 단계를 넘어, 자신이 책에 대한 심각한 중독증을 앓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이 못 말리는 독서광 비블리 씨의 기이하면서도 매력적인 책에 대한 사랑 고백을 꼭 한 번 읽어봐야할 것 같다.

 

by 레삭매냐 | 2009/11/02 14:33 | 책책책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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